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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무서

십자가 형태의 사체 - 김해선 사건

by 김황도 2011. 12. 18.

퍼옴


십자가 형태의 사체


사라진 소녀
2000년 10월 25일 저녁 어스름 무렵, 선운사와 복분자술, 고인돌 유적지로 유명한 전라북도 고창훈 해리면은

가을걷이가 끝난 농촌 특유의 넉넉하면서도 애잔한 황토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생 혜인이(가명, 11세)는 명랑하고 밝은 성격이라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고,

방과 후에도 이런저런 놀이를 하다가 귀가하곤 했다. 하지만 학교 가까이 사는 친구들과 달리 걸어서

2시간 이상 걸리는 먼 곳에 살기 때문에 친구들과 헤어지면 집에 전화해서 엄마나 아빠에게 데리러 오라고 해야했다.

그날도 그랬다.

오후 3시 30분쯤 수업이 끝나자 혜인이를 중심으로 6명의 친구들이 교실에 남아 재잘거리며 만들기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5시 10분, 서산에 노을이 곱게 물들기 시작하자 집이 먼 혜인이는 마음이 급해졌다.

“나 먼저 갈게”
“같이 가자”

친구 인옥이(가명)가 따라나섰다.

손을 맞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300미터를 함께 온 두 아이는 중학교 정문 앞에서 공중전화를 발견했고,

혜인이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양계장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한창 일에 매달려 있었고 마침 집에 도착한 중학생 오빠가 전화를 받았다.

“알았어, 혜인아. 엄마한테 너 데리러 가시라고 말할게”

5시 40분이었다. 방향이 같은 두 아이는 500미터를 더 걸었고, 우정의 징표로 가게에서 장난감 강아지를 하나씩 사들고 헤어졌다.

6시 10분 경, 살아 있는 혜인이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순간이었다.

 

실종 당시 혜인이의 옷차림 재현

단 5분 사이에 무슨 일이!
한편 집에서는 혜인이 엄마가 딸을 데리러 갈 생각에 양계장 일을 서둘러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다 아들에게 혜인이가

30분 전에 전화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 지금 바로 데리러 갈게”

트럭에 올라 시동을 걸면서 혼자 외진 길을 걸어올 혜인이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조금만 더 빨리 끝내고 올걸’ 혼자 걸어오고 있을 자그마한 혜인이를 지나치지나 않을까 목을 빼어 좌우를 살피며

운전하던 엄마는 자전거를 끌고 언덕길을 올라오던 같은 마을 중학생 철수(가명, 13세)를 만나 물어보았지만

혜인이를 못 보았다는 것이다. 6시 15분, 혜인이가 친구와 헤어진지 단 5분이 지난 때였다.

불안함과 초조함에 속도를 낸 엄마는 학교에서 집에 이르는 길을 몇번이나 왕복했지만 혜인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7시, 엄마는 인근에 있는 해리 파출소로 달려가 실종 신고를 했고 경찰과 주민들은 밤늦도록 혜인이의 이름을 불러대며

인근 야산과 들판, 맨홀등을 수색했지만 혜인이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십자가 형태로 발견된 시체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경찰서에서 지원받은 형사들과 기동타격대원, 파출소 전 직원과 자율 방법대원 등 주민들이 함께

혜인이를 찾으러 나섰다.

9시 20분, 어제 혜인이 엄마와 철수가 마주쳤던 언덕길 주위의 야산을 수색하던 주민 자율 방법대원 김씨(35세)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양지바른 무덤 위에 발가벗겨진 여자아이가 십자가 형태로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김씨는 곧 정신을 추스리고 소리 높여 외쳤다.

“여기야! 찾았다!”

도로에서 150미터 떨어진 청룡산 2부 능선 지점이었다.

곧 전북지방경찰청 감식계장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부 분소 법의학 박사가 현장으로 달려와 합동 현장 감식과 사체 검시가 이루어졌다.

혜인이의 셔츠와 점퍼는 둘둘 말린 채 베개처럼 목을 받치고 있었고, 바지는 접힌 채 방석처럼 엉덩이 밑에 놓여 있었다.

혜인이의 속옷과 잘린 바지 조각, 운동화 등은 모두 책가방 속에 가지런히 담긴 채 사채의 발 옆에 놓여 있었다.

사체는 사타구니 상처 등 성폭행의 흔적이 역력했으며 목 졸린 자국(색흔)이 있었다.

뒤이어 실시한 부검 결과 역시 처녀막 파열을 확인했으며, 사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목이 졸려 숨 막혀 사망)’였다.

그러나 정액은 검출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강간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즉 사망 전이나 후에 손 등을 이용한 성추행이 있었고 저항을 막기 위해 목을 누르다가 죽인 것으로 수사진은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사망 시각은 실종 당일 저녁 9시 이전으로 추정되었다.

사체 발견 직후 현장을 철저히 봉쇄한 채 현미경을 들고 바닥을 샅샅이 훑던 현장감식반이 얻은 귀중한 소득이 있었으니 바로 발자국(족적)과 모발, 체모 몇 점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니만큼 주민들 신발만 다 대조해봐도 곧 잡힐 거라는 기대에 수사진의 마음은 부풀어올랐다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을 채취하는 모습

누가, 도대체 왜?
착하고 예의바른 열한살짜리 소녀를 누가, 왜 살해했을까?

친구와 헤어진 후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단 5분 안에 어떻게 혜인이를 감쪽같이 납치해 갈 수 있었을까?

줄곧 미행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던 것인가, 우연히 마주친 뒤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인가?

범인은 한명인가, 2명 이상인가? 혜인이나 혜인이 가족과 관계가 있는 사람인가? 혜인이를 아는 사람인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더구나 어떤 메시지를 잠아 전시하듯 무덤 위에 십자가 형태로 누운 채 발견된 사체의 모습 때문에 사이비 종교 집단이

세상에 경고하려고 저지른 범죄라는 일부 전문가와 언론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수사진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일부에서는 고지능, 고학력의 전문가가 완전 범죄를 노리고 치밀한 계획하에 저지른 범행이며 제 2, 제3의 범행이 뒤따를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아직 전문적인 범죄 분석 프로그램이나 범죄심리학적인 ‘범죄 인상 추정(크리미널 프로파일링)’ 기법을

도입하지 않은 고창 경찰서로서는 일단 현장 수사와 탐문 수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목격자와 용의자
경찰은 사체 발견 현장 부근과 피해자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혜인이의 실종 당시 모습을

재현한 그래픽을 출력하여 배포하면서 목격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격자들이 나타났고, 이에 따라 용의자들도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실종 당일 혜인이 엄마와 마주쳤던 철수는 혜인이 엄마를 만나기 200여 미터 전에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를 스쳐 지나쳤다고 진술했는데, 그 인상 착의는 다음과 같다.

나이 : 40대 초반 정도
키 : 173센티미터 정도
체격 : 뚱뚱하면서도 건장함
머리 : 짧은 스포츠형
옷차림 : 검은색 조끼와 청바지

곧 또 다른 목격자가 나타났다.

인근 부대에서 상근예비역으로 복무중인 김창주(가명, 23세) 씨가 사건 당일 저녁 6시 15분경 화물차를 타고 지나다가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인상의 남자를 목격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또한 이 남자를 약 200여 미터 지나친 지점에서 경찰이 작성한 전단지와 같은 복장으로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여자 어린이를 본 것 같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김씨는 자전거를 끌고 가는 철수 군도 보았다고 진술했으나 철수 군은 김씨의 화물차를 본 적이 없다고 진술하여 의문점을 남겼다.

또한 같은 시간대에 그 일대를 지난 목격자들 중에 피해자를 보았다고 진술한 사람은 오직 김씨뿐이었다.

이 의문점은 경찰이 풀어야 할 숙제였다.

혜인이와 같은 마을에 사는 이기묵(가명, 38세) 씨 역시 학교에서 두 아이를 태워 귀가하던 중 같은 장소, 비슷한 시간에 걸어가는 40대 남자의 모습을 목격했는데, 인상 착의 역시 같았다.

경찰은 이 40대 남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몽타주를 작성해 배포하고 대대적인 수색 작전에 돌입했다.

경찰이 작성한 용의자 수배 전단

이제 경찰은 신데렐라를 찾아 유리 구두를 들고 온 마을을 헤매는 왕실 시종처럼 족적이 일치하는 신발을 찾아 온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시에,

몽타주와 유사한 인상 착의를 가진 사람을 찾아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탐문 수사를 진행하다 보니 의심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보를 통해 용의 선상에 오른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이진수(가명, 27세) - 인근 건설공사장 기술자. 사건 전날 오후 5시경 피해자 혜인이를 길에서 만나  차에 태워준 사실이 드러났고,

사건 당일에도 오후 5시 경에 실종 장소 부근에 차를 주차시키고 있는 것이 목격됨

최준규(가명, 45세) - 일정한 직업 없이 노모와 단 둘이 실종 장소 인근에서 사는 자로,

사건 당일 실종 장소 부근을 배회하는 것이 목격됨

김창주(가명, 23세) - 실종 직전 유일하게 피해자를 목격한 자로, 진술대로라면 자전거를 끌고 오던 철수가 보았어야 하는데,

철수는 김창주의 차가 지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

박창달(가명,41세) - 용의자의 몽타주와 매우 닮았으며 일정한 직업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자주 목격됨

박봉태(가명,43세) - 술만 먹으면 지나가는 여성을 희롱하고 괴롭혀 자주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

주위에서는 정신질환자라고 알고 있으나 본인은 부인함

경찰은 이들에 대해 집중적인 주변 수사를 했으나 김창주를 제외한 용의자들은 범행 시간대에 알리바이가 성립하는 등 뚜렷한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집에서도 현장에서 발견한 족적과 같은 신발 역시 찾지 못했다.

김창주는 사건 당일 피해자를 목격한 이후 여자친구와 휴대전화로 통화하며 전주에 있는 여자 친구 동생의 집까지

차를 몰고 갔다고 진술했으나 동거녀 외에는 알리바이를 입증해줄 증거나 목격자가 없어 계속 용의선상에 남아 집중적인 수사를 받았다.

과연 범인은 이들 중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제 3의 인물인가?

몽타주가 작성된 40대 남자는 누구인가, 과연 그 범인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누구에게도 목격되지 않고 범행을 저지른 것인가? 마을 사람인가, 외지인인가?

수사진과 언론,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의혹과 의문만이 난무했다.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와는 별도로 현장에서 발견된 섬유, 잉크, 흙 등에 대한 성분 분석과

출처 확인 작업, 호구 조사식 탐문 수사, 그리고 사건 현장 부근에서 이루어진 휴대전화 통화 기록 조사 역시 계속 진행되었다.


또 다시 소녀가 실종되다
혜인이의 사건이 발생한지 55일이 지난 12월 19일 저녁, 학교에서 귀가하던 소녀가 실종되는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혜인이가 피살된 곳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고창군 무장면 비포장 도로,

함께 귀가하던 중학교 1학년짜리 남동생과 여고생 박이슬(가명, 17세) 양 남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고창 전체가 살인마에 대한 공포로 뒤숭숭한 가운데 남매가 늦도록 귀가하지 않자 불안해진 아버지는 아이들을 찾아나섰고

완전히 어두워진 저녁 8시가 될 때까지 찾지 못하자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가능한 모든 인력을 현장에 보냈고 주민 자율 방범대원들도 현장으로 달려와 새벽 3시까지 수색을 벌였으나 어둠 때문인지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예술과 문화의 고장으로 예로부터 도둑이나 범죄 없이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고창이 어쩌다 하루아침에 공포의 마을로 변해버린 것인지 주민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슬양의 친구들을 조서한 것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 남매의 실종 전 행적은 이렇다.

오후 3시 40분경 수업을 마친 이슬 양은 인근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을 만나 함께 걸어서 귀가하다가 다리도 쉴 겸 도중에 있는 친구 상희(가명) 양의 집에 들렀다.

상희 양과 이야기를 나누며 놀던 이슬 양 남매는 5시 쯤 상희 양의 집을 나와서 1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집으로 향했고, 이것이 남매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모습이었다.

혜인이가 실종되던 당시와 시간이나 상황이 너무 흡사했기 때문에 이슬양의 부모와 경찰, 주민들은 모두 불길한 예감에

치를 떨면서도 혼자가 아닌 남매이기에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무너진 기대, 발견된 시신
이른 아침부터 수색은 다시 시작되었고 공교롭게도 혜인이의 시체가 발견된 것과 같은 시각인 9시 20분,

상희 양의 집에서 700미터, 이슬 양의 집에서 300미터 떨어진 정수장 근처 길 옆 5미터 아래 풀밭에서 남동생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발견자 역시 자율 방범대원인 것도 혜인이 때와 같았다.

남동생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양손은 신고 있던 운동화 끈으로 뒤에서 묶여 있었고,

목도리로 눈을 가린 상태로 논두렁에 엎어져 있었다.

목에는 노란 노끈이 감긴 채 뒤쪽으로 매듭이 매어져 있었다.

사체 옆 3미터 거리에는 흰색 운동화와 가방 2개가 아무렇게나 팽개쳐 있었다. 명백한 타살이었다.

혹시나 살아 있지 않을까 했던 가족과 경찰, 마을 사람들의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형사는 사체에서 5미터 떨어진 곳에서 브래지어와 여성용 팬티가 조각난 채 뭉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란색 노끈 조각들도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동생을 살해한 범인이 누나의 속옷을 흉기로 잘라 벗겨낸 후 성폭행을 시도하다가 여의치 않자 발각될 것이 두려워

노끈으로 결박한 채 어디론가 끌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이었다.

곧 길 건너편 보리밭에서 남자와 여자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두 쌍의 발자국이 100미터 길이로 나란히 이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발자국은 동생의 사체가 발견된 곳에서 500미터 떨어진 야산 입구 부근에서 사라졌다가 15미터 떨어진 곳에서

남자의 발자국만 야산에서 내려와 밭둑을 따라 멀어져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두 사람이 야산에 올라갔다가 한 사람만 내려온 것이 분명했다.

길도 없는 언덕을 덤불과 가지들을 헤치고 올라가 수색하니 소나무 숲 가운데 무덤이 있는 공간이 나타났고,

무덤 왼쪽 소나무 밑둥에 무엇인가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싸늘하고 음산한 기운에 뒤통수가 쭈뼛해지는 것을 느끼며 가까이 다가간 경찰 수색팀은 이제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앞으로도 볼 수 없을 처참한 광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후에 이슬 양으로 확인된 사체의 교복 치마는 뒤집힌 채 가슴 위쪽까지 걷어올려져 얼굴을 덮고 있었고,

두 손은 노란색 노끈에 묶인 채 각기 다른 나무에 매어 있었다.

왼발은 스타킹과 신발이 모두 벗겨져 있었지만 오른발은 신발과 스타킹이 모두 신겨져 있었는데 벗겨진 스타킹은 오른쪽 소나무에 묶을 때 사용되었다.

왼손에는 장갑이 끼워져 있었으나 오른손 장갑은 벗겨져 잘린 채 입 안에 구겨넣어져 있었다.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게 재갈을 물린 것이다.

교복 상의는 단추가 모두 벗겨진 채 활짝 열려 있었고 스웨터 등 다른 옷가지들은 칼로 잘라 벗겨낸 뒤 사체의 등을 받치듯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흰색 목도리는 마치 붕대 감듯 터에서 머리쪽으로 감겨 있었다.

피해자를 완전히 제압하고 통제한 상태에서 갖은 고문과 추행을 행하려 한 의도가 확연히 드러났지만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어지럽고 불필요한 동작들도 많았다.

범인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임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사체의 상태는 더욱 처참하고 난폭했다.

목과 다리, 가슴, 복부, 음부 등 여러 곳에 칼로 찔리거나 벤 상처가 있었고 강간의 흔적이 역력했으며

오른쪽 허벅자는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 정도를 도려내어 사라지고 없었다.

등 뒤에 받쳐놓은 옷가지들은 모두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 한 행동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혜인이 사건과 같은 발자국, 다른 수법
현장에서 채취된 족적흔(발자국)은 곧 혜인이의 사건 현장에서 채취된 족적흔과 대조되었고 같은 신발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두 사건 사이의 공통점도 일부 있지만 차이점이 더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같은 족적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의문을 증폭시켰다.

두 사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리해보자.


두 사건의 공통점

두 사건의 공통점을 통해 분석해 보면, 범인은 성적인 욕구 불만이 있으면서 외모나 사회적 지위 등으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나이 어린 여학생에게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직장인이라면 한창 일할 늦은 오후 시간에 범행하고 그보다 이른 시간에 범행 준비를 하고 피해자를 물색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직 상태거나 야근 근무 등 비일상적 근로를 하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주로 시골길과 야산을 이용했으며, 특히 무덤가 등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 변태적 욕구 충족을 시도한 것으로 보아 걸어서

산길을 많이 다니는 직업이나 취미,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무덤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도 있으나 시골 야산에서 범행할 만한 공간은 주로 무덤 옆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사체를 숨기거나 은폐할 의도를 전혀 드러내지 않은 점으로 보아 범인은 피해자들과 전혀 안면이 없는 낯선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두 사건의 차이점

 

혜인이 사건으로 용의선상에 올랐던 사람들은 그동안 집중 수사와 밀착 관찰 상태에 있었으나 특별한 동향이 감지되지 않았다.

두 사건의 범인이 동일인이 아니라면, 이슬 양 사건의 범인이 혜인이 사건 범인과 똑같은 제품과 치수의 운동화를 신고 있거나,

혜인이 사건 범인의 운동화를 신고 범행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엄청난 우연의 일치거나 살인 집단,

혹은 살인 가족의 릴레이식 범행이란 말인가?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만약 동일범이라면 범행을 거듭하면서 그 수법과 양상이 변화하고 이전 범행으로부터 배운 것을 다음 범행에 활용하는

연쇄살인범의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더욱이 범행을 할수록 더 치밀해지고 잔혹해지고 난폭해진다는 사실은 살인에 대한 중독성이 강해졌고

이상 심리에 따른 변태적 욕구가 더욱 강해졌음을 뜻하기 때문에 다음 범행까지의 냉각기가 더 짧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즉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곧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결정적인 목격자
현장 일대를 집중 탐문수사하던 경찰에 긴급 제보가 들어왔다.

이슬 양 남매가 실종되기 30분 전에 같은 장소에서 이상한 남자에게 뒤쫓기다 간신히 도망쳤다는 여고생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 여고생이 진술하는 남자의 인상 착의는 혜인이 사건의 목격자들이 진술한 40대 남자와 거의 일치했다.

곧이어 다른 여고생이 이슬 양 실종 하루 전인 18일 오후 5시경 같은 장소에서 혼자 귀가하다가 역시 같은 인상 착의의 남자가 쫓아오는 느낌을 받고 뛰어서 귀가했다는 제보를 해왔다.

모두 간발의 차이로 피살이의 위기를 넘긴 생존자들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남자를 찾아 목격자들에게 확인하는 일이었다.

혜인이 사건 이후 범행 현장과 혜인이 거주지 주변에 집중되었던 탐문은 이제 4킬로미터 떨어진 무장면 일대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무장면에서 여고생 납치 시도가 여러 차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범인의 거주지는 혜인이가 살해된 해리면이나 혜인이의 거주지인 심원면이 아니라 무장면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었다.


마당에 널린 발자국, 쏟아진 증거
수사진은 범인이 이슬 양의 살해 현장에서 도주하면서 찍힌 발자국 방향에 있는 집들을 하나씩 방문하며

몽타주를 닮은 3,40대 남성과,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과 일치하는 운동화가 있는지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정오 무렵, 범행 현장 야산의 반대쪽에 위치한 외딴집 마당에 들어서는 고창경찰서 강형사의 눈에 어지러이 찍힌 낯익은 발자국이 보였다.

주머니속에서 족적이 찍힌 종이를 꺼내 마당 바닥의 발자국과 대조하는 강형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한눈에 봐도 정확히 일치했다. 집에는 노부부만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관들을 보고 놀란 노부부에게 강형사가 물었다.

“혹시 아드님이 계시나요?”

“예, 지금 산에 나무하러 갔는데요?”

“고창경찰서 형사계 강현산데요,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거든요. 집 좀 둘러봐도 되겠지요?”

“그러세요”

뒤따라온 현장 감식반은 마당의 족전 문양에 L자형 자를 대고 사진찍은 후 석고를 떴다.
집 안을 둘러보던 강형사의 눈에 작은 방 장롱 위에 놓인 노란 노끈이 들어왔다.

“할머니, 저 장롱 위에 물건은 누구껍니까?”

“내 아들 방이니까 아들 것이겠지요”

“좀 꺼내봐도 되겠지요?”

“그러세요, 별 건 아닐텐데...”

안주인을 입회시킨 후 사진을 찍고 장롱 위에 있는 노끈과 낡은 가방을 내렸다.

노끈은 이슬 양을 결박할 때 사용한 것과 같았고, 가방 안에서는 핏자국이 선명한 낚시용 칼 하나와 칼집, 면장갑 한 켤레,

녹색과 검은색 줄 한 뭉치, 피묻은 속옷과 셔츠 등 옷가지 여러 벌이 나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감정을 해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증거가 되고도 남았다.

노부부의 아들은 서른 두 살의 노총각 김해선, 외지를 떠돌다 3개월 전에야 집에 돌아와서 그동안 하는 일 없이 술먹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기만 했다고 한다.

노부부에게서 김해선의 사진을 받아 다른 사진들과 함께 목격자들에게 보이니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김해선의 사진을 지목했다.

실제보다 나이들어 보이는 김해선은 몽타주와도 상당히 흡사했다. 이제 검거할 일만 남았다.

김해선이 겁을 먹고 도주하지 않도록 경찰력을 모두 철수시킨 채 형사 3명만 집 안에 몸을 숨기고 기다리기로 했고,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노부부도 순순히 협조했다.

오후 4시, 집으로 들어오던 김해선은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마당 앞에서 멈칫했다.

다 잡은 범인을 놓치는 게 아닌가 싶은 초조함에 뛰쳐나갈까 말까 망설이던 형사들은 애써 침착성을 유지했고,

김해선은 집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김해선이 미리 정해놓은 체포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형사들이 덮쳤다.

“꼼짝마, 김해선. 당신을 이슬 양 남마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긴급 체포한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체포될 것을 예상했는지 의외로 저항은 없었다. 김해선이 검거된 후 김해선 집 주위에서 추가 수색이 이루어졌고,

집 앞 도랑에서 비닐 봉지에 넣어 버려진 이슬 양의 허벅지 살점도 발견되었다.

 

김해선의 집 앞 도랑에서 발견된 살점이 든 비닐봉지


범행의 재구성
체포된 김해선의 자백과 증거, 목격자들의 증언들을 종합해서 재구성해본 범행의 전모는 이렇다.


범행 전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가출했던 김해선은 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외항선을 탔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만난 동거녀에게는 강간죄로 고소 당해 처벌받고,

그 후 다시 만난 다방 아가씨는 자기가 준 돈으로 다른 남자를 만나자 격분하여 세상을 비관하기 시작했다.

다방 아가씨와 그 애인이 자고 있는 방에 도시가스관을 잘라넣고 불을 지르려다가 일이 커질 것이 두려워 포기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김해선은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3개월동안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기도 하고 술을 마시거나 혼자 산을 돌아다니며 소일하고 있었다.

부모는 물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객지 생활을 하는 동안 저지른 범죄가 강간, 특수 절도, 폭력 등 모두 전과 7범이었다.



1차 살인
2000년 10월 25일, 아침부터 복분자주를 컵으로 거푸 들이키다 만취한 상태로 집을 나와 마구 쏘다녔고,

정신을 차려보니 집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산 중턱에 기대앉아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미 해가 져서 주위가 어슴푸레했고 술이 깨자 기분도 좋지 않은 데다 허기진 상태에서 산을 내려와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차가 두어 대 지나가긴 했지만 통행이 별로 없는 한적한 시골 도로였고, 자전거를 끌고 가는 학생과 마주쳤지만 그저 스쳐지났을 뿐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 때 갑자기 앞 길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여자 어린이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고, 김해선은 순간적으로 길을 건너 그 어린이에게 다가갔다.

“어머!”

당황한 여자 어린이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려 했고 김해선은 왼손으로 아이의 목을 감아 안고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건장한 체격에 선원 생활로 다져진 30대 남자의 근육은 가냘픈 여자 어린이를 제압해 산길로 끌고 올라가기에 충분했다.

지나가는 차에 들키지 않으려고 한참을 끌고 올라간 김해선은 평평한 밭과 묘지가 나오자 기절한 듯 의식이 없는 아이를 뉘고 가방을 벗겨내 뒤지기 시작했다.

“5학년”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인 책과 공책들이 나오고 필통 안에는 커터칼이 있었다.

커터칼을 꺼내든 김해선은 아이의 옷을 칼로 잘라 모두 벗겨낸 후 잘린 옷가지로 두 손을 뒤로 묶고 입에도 재갈을 물린 다음 추행했다.

한참을 지나도 아이가 깨어나지 않자 얼굴을 아이의 코에 갖다 댄 김해선은 아이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손의 결박과 입에 물린 재갈을 풀고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언제부터인가 길 쪽에서 사람들이 누군가를 외쳐 부르며 찾아다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초조해졌다.

그 후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이를 무덤 위에 반듯이 뉘고 옷가지를 모아 가방 안에 가지런히 넣어두고 내려온 것 같았다.

모두 3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살인 이후 냉각기
범행 후 산에서 내려온 김해선은 시장통 성인 오락실에 들어가 동전을 바꾼 후 빠찡고와 유사한 오락(일명 ‘과일게임’)을

 20분 정도 하다가 나와 9시 반 경 집앞에 도착했으나 낮에 일하지 않고 돌아다녔다고 아버지가 싫은 소리를 할까봐

비닐하우스에서 부모님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밤 11시경 부모님의 눈을 피해 숨어들듯 방으로 들어간 김해선은 복분자주 3잔을 마시고 누웠다.

이후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자신이 살해한 어린이가 누구고 수사가 어떤 방향으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가끔씩 죄책감이 들어 자살을 해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술을 마시면 모든 걸 잊어버렸다.

불쑥불쑥 범행 장면이 떠올라 오랫동안 공상에 잠기곤 했는데, 현실에서 범행할 때 당황해서 못 채운 욕망을 상상 속에서 대신 채우기도 했다.

거리를 지나며 저녁 어스름만 되면 지나가는 여성들을 덮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지만

어디에선가 경찰이 감시하고 있을 것 같아 억지로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55일이 지났다.



2차 살인
2000년 12월 19일, 그날도 살인에 대한 죄책감과 구차한 인생에 대한 비관 등으로 우울해진 기분을 달래기 위해

대낮부터 복분자주 예닐곱 대접을 퍼마신 뒤 만취 상태에서 칼과 노끈, 장갑이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한참을 헤매다 야산에 올라가 잠이 들었고 깨어나니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

산을 내려와 인근 중고등학교까지 걸아간 김해선은 강간할 작정을 하고 혼자 귀가하는 여학생을 찾아 눈을 번득거리다 곧 공격대상을 발견했다.

300미터 거리를 두고 여학생의 뒤를 쫓아가던 김해선은 인적이 끊긴 오솔길에 이르자 그 거리를 200미터로 줄였고 점차 100미터, 급기야는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까지 따라붙었다.

그러자 갑자기 여학생이 뛰기 시작했고 때마침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는 바람에 김해선은 여학생을 놓쳐버렸다.

아쉬움과 허탈감을 느낀 김해선은 근처에 있는 빈 건물 모퉁이에 기대 앉아 다음 공격 대상을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고,

20분 쯤 후에 일어나니 사위는 어두워져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 남녀 학생이 함께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두 학생 앞으로 다가간 김해선은 냅다 양손으로 가슴을 밀어 두 학생을 5미터 아래 논두렁으로 굴러 떨어뜨리고는 뒤따라 내려갔다.

남학생이 소리를 지르자 입을 막고 목을 졸라 의식을 잃게 하고는 남학생의 운동화를 벗겨내 끈을 풀어 양손을 뒤로 묶었다.

그 사이 여학생은 겁에 질렸는지 엎드린 채로 벌벌 떨며 가만히 있었다.

남학생의 숨소리를 확인하니 이미 죽은 것 같았지만 더 확실히 하기 위해 가방 안에서 준비해 간 노란색 노끈을 꺼내 목에 감고 힘껏 졸라 확인 사살을 했다.

저만치 길 위에서는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학생에게 몸을 돌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걸 보고 칼을 꺼내 들이대며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고는 양손을 노끈으로 결박했다.

칼로 여학생의 팬티와 브래지어를 잘라내고 강간을 하려 했으나 자꾸 반항하고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가까운 곳이라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칼로 위협을 해서 울며 애원하는 여학생을 끌고 500미터 떨어진 야산으로 올라갔다.

평소 산을 돌아다니며 미리 봐두었던 무덤가 소나무 숲으로 간 김해선은 여학생을 바닥에 뉘고 결박된 두 손을 소나무 밑둥에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곤 준비해 간 노끈이 부족하자 여학생의 한 쪽 스타킹을 벗겨내어 노끈과 함께 두 다리를 나무에 묶는 데 사용했다.

스웨터를 잘라내 여학생의 등 위에 깔고 상의 단추를 모두 끌러 열어제치고는 치마를 들쳐올리고 강간했다.

강간을 하고도 욕구가 다 해소되지 않자 칼로 여학생의 몸 이곳저곳을 찌르고 베며 고문하고 괴롭히다가 심장 부위를 찔러 살해했다.


범행 이후
김해선은 이슬 양을 고문끝에 살해한 후에도 30분 동안이나 사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본인도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거나 그저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는 칼로 사체의 허벅지살을 도려내어 비닐 봉투에 담아 가방에 넣고는 산을 내려와 논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8시 반이었다.

처참하고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저지르고 돌아온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태연하게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정 무렵 편하게 잠들었다.

김해선은 경찰 조사에서 범행 후 자신이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드라마 <사랑은 아무나 하나>와 토크쇼 <서세원 쇼>였으며

그 내용까지 뚜렷이 기억한다고 진술하여 형사들을 경악시켰다.

혈액형 확인을 위해 혈액 채취 동의 여부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주사 바늘이 싫어 혈액 채취는 동의할 수 없고 대신 머리카락을 채취하는 것은 동의합니다”라고 대답하여 또 한번 경찰을 아연실색케 했다.

사건 다음날인 20일, 아침에 일어나 싱크대 위에 놓은 살점을 발견하고는 처리 방법을 고심하다가 두려운 마음이 들어

비닐로 몇 겹을 더 싸고는 집 앞 도랑에 던져버렸는데, 검거 후 경찰 조사에서는 자신이 살점을 떼어낸 것은 기억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살점을 도랑에 던진 후 집을 나온 김해선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방 안에 놔둔 증거물들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후 4시 경 집으로 돌아왔고 잠복중인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해선의 범죄 심리 분석


선천적 요인
김해선은 신체나 뇌기능상 장애가 전혀 없는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연쇄살인에 이른 선천적 요인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어린시절부터 강아지 등 약한 동물에게 심한 가학 행위를 했고, 중학생 때는 별 이유 없이 낫으로 이웃집 황소의 배를

찍어 죽이는 등 극도로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모습을 나타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뇌 신경 전달 물질인 세로토닌의 활동량을 측정해볼 필요는 있다.

또한 경찰의 의뢰로 김해선의 심리 검사를 실시한 정신 보건 임상 심리사의 보고서에서

김해선이 일반인에 비해 다소 지능이 낮고 스트레스 대처 능력 등이 부족하며 흥분을 잘하고 충동적이라고

지적한 사실 등을 감안할 때,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아직 교도소에 수감중인 김해선에 대해 좀 더 면밀한 뇌기능 검사를

실시해서 연쇄살인범 연구를 통한 예방책 마련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혜인이 사건의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그린 몽타주(좌)와 김해선의 실물 사진(우)


어린 시절의 충격적 경험
김해선의 연쇄살인 범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을 꼽으라면 아마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일 것이다.

김해선 본인과 주변의 진술에 따르면 김해선의 아버지는 별 이유 없이 습관적으로 어린 김해선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했으며

심지어는 발가벗긴 채 벨트로 온 몸을 때리고 집밖으로 내쫓기도 했다고 한다.

순종적인 어머니는 어린 해선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해선의 뇌구조나 기능에 문제가 발견된다면 선천적 문제보다는 학대에 의한 후천적인 영향이 컸다고 보인다.

어린 시절 김해선은 친구도 거의 없었으며 주위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가까이 하기 싫은 ‘무섭고 이상한 아이’로

남아 있다는 점도 학대로 인한 정서 장애와 성격 장애 등이 대인 관계 장애와 품행 장애로 이어져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외톨이, 말썽쟁이가 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김해선은 사춘기 이후 한번도 대중 목욕탕에 간 적이 없다고 진술했으며 다른 사람 앞에서 맨살을 보인 적이 없어

주변에서는 화상을 입어 심한 흉터가 남았다고 믿을 정도였는데, 그 이유가 어린 시절 발가벗겨진 채 매를 맞고

쫓겨났던 충격적인 경험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번째 피해자 혜인이를 살해한 후 옷을 모두 벗겨낸 것도 어린 시절에 생긴 알몸 상태에 대한 무의식적인 강박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김해선에 대한 정신 감정 결과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였다. 반사회적 성격 장애는

청소년기의 품행 장애가 성인기로 진행되면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린시절에 학대받은 충격이

결국 김해선의 연쇄 살인 범죄에 상당한 영향을 준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청소년기 학습
인성 형성에서 청소년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김해선은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가출한 뒤로 전혀 교육적이라고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아무 통제도 받지 않으며

멋대로 살았다. 근로 현장에서 노동의 가치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배웠다면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김해선은 그렇지 못했다. 물론 본인의 문제가 가장 컸지만 바람직한 역할 모델이 되어줄 어른을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음주벽이나 빗나간 성탐닉 역시 이 시기에 습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청소년기를 통해 긍정적인 학습 효과에 의한 ‘정적(正的) 사회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반면,

법과 규칙을 어기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은 개의치 않는 ‘정글의 법칙’같은 ‘부적 (否的) 사회화’가 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외부 스트레스 요인
범행 당시 김해선은 실직 상태였으며, 중학교 때 가출할 정도로 무섭고 싫었던 아버지 곁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을 정도로

사회 생활에서 실패와 좌절을 겪었다. 범죄 전과도 7범이나 되었기 때문에 정규적인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처음에 동거한 여인에게는 강간죄로 고소당하고, 두번째 여인에게는 외항선을 타고 번 돈을 모두 퍼주고 배신당했다.

혜인이를 살해한 당일에도 농사일 돕기가 싫어 집을 나와 쏘다녔고, 사람을 죽이고 난 뒤에도 농사일을 돕지 않은 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전전긍긍할 정도로 고향집과 아버지는 커다란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촉발 요인
서른 한살 먹은 남자가 외지에서 귀향한지 3개월만에 연쇄 살인을 범했던 촉발 요인은 ‘무료함’과 ‘술’ 두가지로 판단된다.

어린 시절부터 삶 전반에 축적된 문제 외에 범행 직전에 일어난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친구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시골 고향집에서 3개월을 지내다 보니 무료함이 극에 달했고

이를 달래기 위해 마신 술이 억눌렸던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선이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을 보면 피해자들에 대한 성추행을 ‘장난’, ‘놀았다’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회에 대한 분노나 여성에 대한 혐오 등의 동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아무 이유 없이’, ‘재미로’ 사람을 괴롭히고 살해한 것이다.

어린 시절 강아지를 괴롭히고 황소를 낫으로 찍었던 것과 같은 심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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